맨위로가기

아마치 슌이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마치 슌이치는 일본의 야구 선수, 심판, 코치, 감독, 야구 평론가이다. 메이지 대학 포수 출신으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원을 거쳐 고시엔 대회 심판을 맡았다. 1949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1954년 팀을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시리즈를 제패했다. 197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76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니시노미야시 출신 - 다구치 소
    다구치 소는 간사이 학생 야구 연맹 최다 안타 기록을 세우고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데뷔하여 NPB와 MLB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며 골든 글러브,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오릭스 코치를 역임한 뛰어난 수비력과 클러치 능력을 가진 야구 선수이다.
  • 니시노미야시 출신 - 아시다 마나
    2004년 효고현에서 태어난 일본 배우이자 가수인 아시다 마나는 3세에 데뷔하여 드라마 '마더'와 '마루모의 규칙'에서 뛰어난 연기력과 최연소 주연으로 주목받았고, 영화, 드라마, 더빙, 가수 활동 및 할리우드 영화 출연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국제적으로도 활동하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졸업생이다.
  • 일본 야구전당 헌액자 - 주만 가나에
    주만 가나에는 메이지 시대의 교육자이자 야구 선수로, "야구"라는 용어를 일본에 정착시키고 일본 최초의 야구 전문서를 출판하여 일본 야구 용어 표준화와 이론 발전에 기여했으며, 교육계에서도 활동한 인물이다.
  • 일본 야구전당 헌액자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센트럴 리그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센트럴 리그 - 후루타 아쓰야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으로 MVP를 수상하고 도루 저지율 신기록을 세웠으며, 선수회 회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여 선수 권익 신장에 기여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을 역임했다.
아마치 슌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Shun'ichi Amachi in 1950
1950년 촬영
이름아마치 슌이치
원어 이름天知 俊一
로마자 표기Amachi Shunichi
출생일1903년 12월 20일
출생지일본 니시노미야시
사망일1976년 3월 12일
사망 당시 나이72세
수비 위치포수
타석알 수 없음
利き腕알 수 없음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70년
헌액 유형경기자 표창
헌액 방법스포츠 기자단 위원회
선수 경력
학교구제 갑양중학교
구제 공옥사중학교
구제 시모노중학교
구제 메이지대학교
감독 및 코치 경력
학교테이쿄상업학교
프로주니치 드래건스
나고야 드래건스
주니치 드래건스
(1949 - 1951, 1954, 1957 - 1960)
감독 정보
최종 감독 연도1958년
승리439승
패배316패
주니치 드래건스 (1949-1950)
니시테쓰 라이온스 (1951)
주니치 드래건스 (1954)
주니치 드래건스 (1957-1958)
하이라이트일본 시리즈 우승 (1954)

2. 선수 및 심판 경력

아마치는 대학 졸업 후 1929년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을 맡았으나 1931년 사직, 호치 신문 기자가 되어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 활동했다. 1939년 하계 고시엔 대회 결승전에서 시마 세이이치의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지켜봤고, 이후 시마와 친분을 맺었다.[14] 1942년 문부성 주최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 결승전 주심을 맡았다.[15]

이후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현 데이쿄 대학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스기시타 시게루에게 포크볼을 전수했다.[16] 1949년 스기시타의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과 함께 주니치 감독으로 취임, 1952년 총감독으로 물러났으나 1954년 감독 복귀, 팀을 센트럴 리그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프로 선수 경력 없는 감독의 유일한 일본 시리즈 우승이다.

1955년 구단 부대표로 감독직을 사임, 1957년 주니치 감독에 복귀했으나 1958년 퇴임했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수석 코치를 맡았고, 이후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197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1976년 사망했다(향년 72세).

2. 1. 학생 야구 선수 시절

아마치는 구제 고요 중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 고교쿠샤 중학교로 전학갔다. 고교쿠샤 중학교 졸업 후 메이지 대학예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당시 중학교 3학년 수료로는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시모노 중학교에 재입학했다. 시모노 중학교에서 4학년을 수료하고 메이지 대학 예과 진학 자격을 얻어 다시 진학하는 등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메이지 대학 시절에는 포수로, 후에 마이니치 오리온스 감독을 맡게 되는 유아사 요시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또한 1년 선배인 니데가와 노부아키로부터 매일 야구 규칙에 관한 퀴즈 10문제를 숙제로 받아[13] 연습 전까지 해결하는 훈련을 통해 규칙을 숙지하게 되었다.

1929년에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심판을 맡았으나 1931년에 사직했다. 이후 호치 신문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 종사했다. 1939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가이소 중학교의 시마 세이이치가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던 결승전의 주심을 맡았다. 시마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하면서, 아마치는 시마와 친분을 맺었고 시마는 아마치를 ‘아맛 상’(あまっさん일본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4]

1942년 문부성 주최로 개최된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헤이안 중학교(현재의 류고쿠 대학 부속 헤이안 고등학교)와 도쿠시마 상업학교와의 결승전 주심을 맡기도 했다.[15]

이후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현재의 데이쿄 대학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때의 제자로는 스기시타 시게루가 있다. 스기시타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개인적으로 지도했고, 1922년에 방일했던 미국 야구단에서 배웠던 포크볼을 전수했다.[16]

2. 2. 심판 경력

1929년에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을 맡았다가 1931년에 사직했다.[13] 이후 호치 신문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 종사했다.[4] 1939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시마 세이이치가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던 결승전 주심을 맡았다.[14]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시마는 이즈미의 메이지 합숙소 근처에 살면서 아마치와 친분을 맺었고, '아맛 상'(あまっさん일본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5]

주니치 감독 취임 이전에는 주로 아마추어 야구 심판을 역임했는데, 1942년 문부성 주최로 개최된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서 헤이안 중학교와 도쿠시마 상업학교의 결승전 주심을 맡기도 했다.[15]

3. 지도자 경력

스기시타 시게루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함과 동시에 아마치도 주니치 감독에 취임했다. 1952년에는 총감독으로 이동했지만, 1954년에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첫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이 일본 시리즈를 제패한 것은 2023년 현재에도 유일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 당시 아마치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을 때도 눈물을 닦았다. 선수들도 "인정파 감독"의 일본 제일에 감격하여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1955년에는 구단 부대표로 취임하며 감독을 퇴임했는데[8],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감독을 퇴임한 것도 아마치가 처음이다[9]

1957년에 세 번째로 감독에 복귀했다. 니시자와 미치오, 고다마 토시이치 등 베테랑 선수들이 아마치에게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여 실현된 것이지만, 스기시타는 아마치가 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몸을 위해 빨리 (감독을) 그만두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0]。아마치는 1958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1959년부터 2년 동안은 헤드 코치로서 선수 겸임 감독인 스기시타와 함께 시즌을 치렀으며, 그 후에는 호치 신문 평론가로 활동했다[4]메이저 리그에도 정통한 아마치는 행크 애런이 통산 홈런으로 베이브 루스를 넘어섰을 때에도 최고의 외야수는 윌리 메이스라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4]

스기시타는 1964년에 한신 타이거스 1군 투수 코치에 취임했는데, 이는 스기시타가 아마치에게 불려 도쿄 신바시요정으로 향하자, 거기에 아마치와 감독인 후지모토 사다하루가 있었고, 아마치에게 "야구는 내 야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후지모토 씨의 야구를 공부하고 오라"는 말을 듣고 취임이 결정된 것이다[11]。1970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그 후 1976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에 취임했지만, 이 취임은 V9 전사의 쇠퇴가 두드러지고 전년에는 구단 사상 첫 최하위가 된 것을 우려하고 있던 센트럴 리그 회장의 스즈키 류지로부터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든 해줘"라는 말을 들은 것과, 아마치의 만년인 1976년 3월에 스기시타가 문병을 갔을 때, 스기시타 왈 "대나가시마 심파"라는 아마치로부터 "힘든 것은 알고 있지만, 나가시마를 도와줘"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기시타는 아마치에게 "힘든 것을 넘어섰습니다"라고 대답했다[12]

3. 1.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메이지 대학 졸업 후,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심판을 맡다가 호치 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도 종사했다.[13] 1939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시마 세이이치가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던 결승전 주심을 맡았다. 시마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즈미의 메이지 합숙소 근처에 살던 아마치는 시마와 친분을 맺었고, 시마는 아마치를 ‘아맛 상’(あまっさん일본어)이라고 불렀다.[14]

1942년 문부성 주최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서 헤이안 중학교와 도쿠시마 상업학교 간 결승전 주심을 맡았다.[15]

이후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현재의 데이쿄 대학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때 제자로는 스기시타 시게루가 있다. 스기시타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개인적으로 지도했으며, 1922년 방일했던 미국 야구단에게서 배운 포크볼을 전수했다.[16]

3. 2. 주니치 드래곤스 감독

스기시타 시게루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함과 동시에, 아마치도 주니치의 감독에 취임했다. 1952년에는 실권이 없는 총감독으로 이동했지만, 1954년에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첫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이 일본 시리즈를 제패한 것은 2023년 현재에도 유일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 당시 아마치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을 때도 눈물을 닦았고, 선수들도 "인정파 감독"의 일본 제일에 감격하여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1955년에는 구단 부대표에 취임하는 형태로 감독을 퇴임했지만[8],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감독을 퇴임한 것도 아마치가 처음이다[9]

1957년에 세 번째로 감독에 복귀했다. 니시자와 미치오, 고다마 토시이치 등 베테랑 선수들이 아마치에게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여 실현된 것이지만, 스기시타는 아마치가 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몸을 위해 빨리 (감독을) 그만두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0]。아마치는 1958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1959년부터 2년 동안은 헤드코치로서 선수 겸임 감독인 스기시타와 함께 시즌을 치렀으며, 그 후에는 호치 신문 평론가로 활동했다[4]

연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배무승부승률
1949주니치5위13766683.493
19502위13789444.669
1951나고야2위11362483.564
1954주니치1위13086404.683
19573위13070573.550
19583위13066595.527
통산: 6년77743931622.581


  •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4. 은퇴 이후

1958년에 주니치 감독에서 물러난 후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주니치 수석 코치를 맡았다. 이후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1970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13] 1976년 3월 12일에 사망했다(향년 72세).[14]

5. 평가 및 유산

아마치는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메이지 대학 시절 포수로서 유아사 사다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또한 대학 야구 심판의 필요성을 느껴 선배 니다데가와 노부아키로부터 야구 규칙 훈련을 받으며 규칙을 숙지했고, 도쿄 6대학 야구 전속 심판원이 되었다.[3] 그러나 야소카와 보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4] 이후 아마추어 야구 심판원으로 활동하며, 제25회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 결승전에서 시마 세이이치의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지켜보기도 했다.[5]

제자 스기시타 시게루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면서 아마치도 감독으로 취임했다. 1954년에는 팀을 첫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으로서는 유일한 기록이다.[8][9] 구단 부대표 취임 형태로 감독에서 물러났지만,[8] 1957년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여 1958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1959년부터 2년간은 헤드 코치로서 선수 겸임 감독인 스기시타와 함께했다.[4]

아마치는 메이저 리그에도 정통하여, 행크 애런이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때도 최고의 외야수는 윌리 메이스라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4] 197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를 맡았지만, 같은 해 3월 12일 사망했다.

6. 상세 정보

아마치는 구제 고요 중학교 2학년 때 고교쿠샤 중학교로 전학한 후, 메이지 대학예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당시 중학교 3학년 수료로는 자격이 없다고 하여 시모노 중학교에 재입학하여 중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메이지 대학 예과 진학 자격을 얻어 다시 진학하는 파란만장한 학생 생활을 보냈다. 메이지대 시절에는 포수였으며, 후에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감독을 맡는 유아사 사다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또한, 니다데가와 노부아키로부터 야구 규칙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3]

아마치는 이 훈련을 통해 규칙을 숙지하여, 1929년에는 도쿄 육대학 야구의 전속 심판원이 되었다. 같은 해 가을 쇼와 천황이 처음으로 진구 구장을 방문하여 관전한 소케이전의 구심을 맡았지만, 1931년 봄에 일어난 야소카와 보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전속 심판 6명이 총 퇴진하면서 아마치도 사임했다[4]

그 후 호치 신문 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에서 심판원을 맡았다. 제25회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 결승전의 구심을 맡기도 했다.[5]

1949년, 제자인 스기시타 시게루주니치에 입단함과 동시에 아마치도 주니치의 감독에 취임했다. 1954년에는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첫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로 이끌었다.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이 일본 시리즈를 제패한 것은 현재까지도 유일하며, 아마치는 일본 시리즈 우승 당시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1955년에는 구단 부대표에 취임하는 형태로 감독을 퇴임했다[8]

1957년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니시자와 미치오, 고다마 토시이치 등이 아마치에게 복귀를 간청하여 실현된 것이지만, 스기시타는 아마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독직을 만류했다고 한다[10]。아마치는 1958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1959년부터 2년 동안은 헤드코치로서 선수 겸임 감독인 스기시타와 함께 시즌을 치렀으며, 그 후에는 호치 신문 평론가로 활동했다[4]

스기시타는 1964년한신 타이거스 1군 투수 코치에 취임했는데, 이는 아마치의 권유로 이루어졌다[11]1970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76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에 취임했지만, 건강 문제로 3월 12일에 사망했다.[12]

6. 1. 출신 학교

구제 고요 중학교(2학년 때 고교쿠샤 중학교로 전학), 구제 시모노 중학교(4학년 수료), 구제 메이지 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6. 2. 지도자 및 기타 경력

‘아맛 상’(あまっさん일본어)이라고 불렸던 아마치는[14] 주니치 감독 취임 이전에 주로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 활동했다. 1942년 문부성 주최로 개최된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서 헤이안 중학교와 도쿠시마 상업학교의 결승전 주심을 맡기도 했다.[15]

이후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때 제자로는 스기시타 시게루가 있었으며, 스기시타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개인적으로 지도했고, 1922년에 방일했던 미국 야구단으로부터 배웠던 포크볼을 전수했다.[16]

1949년 주니치 드래곤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1952년에 실권이 없는 총감독으로 물러났지만, 1954년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해 팀을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의 구단이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한 유일한 사례이며,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감독을 퇴임한 것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유일하다.

1957년에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이듬해 1958년을 끝으로 퇴임했고, 1959년부터 1960년까지는 수석 코치를 맡았다. 이후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1970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2]

다음은 아마치 슌이치의 주요 경력이다.

경력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 감독
주니치 드래곤스·나고야 드래곤스·주니치 드래곤스 감독 (1949년 ~ 1951년, 1954년, 1957년 ~ 1958년)
주니치 드래곤스 수석 코치 (1959년 ~ 1960년)


6. 3. 수상 경력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1970년)[13]

6. 4. 등번호


  • 30 (1949년 ~ 1951년, 1954년, 1957년 ~ 1958년)
  • 60 (1959년 ~ 1960년)

6. 5.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연도소속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
1949년주니치5위13766683.493
1950년2위13789444.669
1951년나고야2위11362483.564
1954년주니치1위13086404.683
1957년3위13070573.550
1958년3위13066595.527
통산77743931622.581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참조

[1] 웹사이트 Japan Baseball Daily http://www.japanbase[...]
[2] 웹사이트 Shunichi Amachi https://www.baseball[...] 2024-07-07
[3] 서적 嶋清一 戦火に散った伝説の左腕 彩流社
[4] 블로그 蛭間豊章記者の「Baseball inside」 : 野球殿堂記者投票への考察⑫(1970年度) 映画のモデルになった名将と「オレがルールブックだ」の名審判。特別は個性的な業績の3人を選出 https://weblog.hochi[...]
[5] 서적 嶋清一 戦火に散った伝説の左腕
[6] 문서 激動の昭和スポーツ史③高校野球
[7] 잡지 ツーシームみたいに 杉下茂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10-17
[8] 서적 中日ドラゴンズ70年史 中日新聞社
[9] 문서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を率いた秋山幸二も日本シリーズ優勝直後に退任している
[10]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産経新聞出版
[11]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12]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13] 서적 시마 세이이치 전쟁에 떨어진 전설의 좌완 사이류샤
[14] 서적 시마 세이이치 전쟁에 떨어진 전설의 좌완
[15] 문서 격동의 쇼와 스포츠사③ - 고교 야구
[16] 잡지 슈칸 베이스볼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1-10-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